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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통영에 사는 선배를 만나 술자리를 가졌다.
나도 나이를 먹는 건지
술이든 밥이든 죽이 잘 맞는 상대를 만나
그릇과 수저를 부딪는 사소한 일들이
서럽게 그립고 메일 때가 있다.
술이 절반쯤 들어갔을 때 갑자기 가방을 뒤적이던 선배가
얼마 전에 친구가 낸 것이라며 시집 하나를 건냈다.
마음의 형편이
예전 같지 않게 자꾸 바닥을 긁으며 상처를 내고 있는 요즘
나는 누군가 내 마음을 듣고 헐레벌떡 뛰어와
마이신 같은 것이라도 쥐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명윤, 그의 시는
돌아가신 외할머니께서 자글자글한 주름 손으로 차려주신
푸성귀와 손맛이 제대로 만난 시골밥상 같다.
거기엔 땀도 있고 아픔도 있고, 쓰고 달고 짜고 매운 맛도 있고
사랑도 있고, 또 내 이야기도 있다.
무수하게 많은 "왜"라는 삶의 의문부호 가운데
느낌표 하나가 들어서는 순간.....
고향에서 마침내 기쁨과 평안을 찾았다는 선배의 말 속에
얼마나 귀한 사람들이 숨 쉬고 있는지
턱없이 술은 좋아하고 실속은 쑥맥이던 선배가
이명윤이라는 이름 뒤에 친구라는 두 글자를 단 것이
그날따라 얼마나 부럽던지.
이명윤, 그가 술을 통으로 마시는지
새침하게 잔만 들었다 놨다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지만
이제부터 이명윤은 내 술친구고, 밥친구다.
가끔 통영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나도 누군가의 고향 사람이 되고 싶다.
손맛
식당에서 찌개를 먹는데 맛이 기가 막혔다
누군가 이십 년 된 손맛이라 일러 주었다
끄덕끄덕 주방 아주머니 손을 훔쳐보았다
식당 마루에
세 살 남짓 아이가 걸어가더니 화분의 몽돌을 집어든다
누구 손맛인지 예쁘게 키웠다
매일 기저귀 갈아 주고 이불 덮어 주고
먹여 주고 닦아 주고 업어 주고 쓰다듬으며 키웠을
손을 생각해 보는 것인데
몽돌이 떼굴떼굴 구른다
부드러운 저 몽돌은 어느 바닷가
파도의 오래된 손맛이다
후식으로 나온 사과도
비와 바람과 햇빛의 손맛이고
사과나무 돌보던 농부의 손맛이다
손바닥을 펴 본다
손 안의 세상이 미지의 눈으로 꿈틀거린다
길가 벚나무의 수많은 손가락이
꽃눈을 밀어 올리던 맛있는 봄날
전화가 왔다
바빠도 밥은 꼭 챙기 묵그라
수화기에서 나온 어머니의 손이 물비늘처럼
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이명윤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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