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재단> 고문이자 참여정부에서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낸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30일 오전 5시 31분 64세를 일기로 별세하셨습니다.
고인은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나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대학 재학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상대 학생회장 시절에는 부정선거 항의집회를 주도하다 제적당해 군대에 강제 징집되기도 했습니다.
1971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으로 지명수배되면서 1979년 10·26 사태 때까지 장기간 도피생활을 했고, 박정희 정권부터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군부독재 치하에서 온 몸을 바쳐 민주화운동을 벌여 ‘재야 민주화운동의 대부’, ‘시대의 양심’으로 불렸습니다.
반역의 시대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탓에 김 고문의 젊은 시절은 수배와 투옥의 반복이었습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이던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해 두 차례 의장을 지내면서 1985년 9월에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23일간 고문기술자 이근안 경감에게 무려 여덟 차례의 전기고문과 두 차례의 물고문을 당하는 등 모진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1988년 출소한 김 고문은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활동을 하다 또 구속돼 1992년까지 옥고를 치렀습니다.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가 되면서 정치권에 들어가 제15·16·17대 국회의원, 참여정부 보건복지부 장관, 열린우리당 의장 등을 지냈습니다.
김 고문은 별명이 ‘신사’일 정도로 성품이 부드러우며 합리적이었지만 정의와 소신을 발휘해야 할 때는 누구보다 당당하게 목소리를 냈습니다. 2009년 4월에는 개인 성명을 발표해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검찰수사의 본질은 정치보복”이라며, “검찰이 스스로 독립을 포기하고 권력에 굴종한다면 그 최후는 철저한 국민의 외면일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2007년 파킨슨병 진단을 받은 김 고문은 그 후에도 미국 쇠고기 완전수입 반대 촛불집회, YTN 사수 촛불집회 등에 참여했고, 지난 7월에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해결을 위한 3차 희망버스를 타고 직접 부산에 내려가기도 했습니다. 최근까지도 야권 통합 등을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김 고문의 장례는 5일장으로 진행되며 발인은 새해 3일 오전입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문의 : 02-2072-2091~2)입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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