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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 - 살기

나도 어버이?

by 멀리있는 빛 2007.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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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찾아오는 어떤 '날'들이 마냥 좋고 기다려지던 때가 있었다.
<새옷과 용돈, 풍성한 상차림 삼종세트>로 연휴의 열배넘는 시간을
마냥 가슴벅차게 보냈던 설과 추석,
평소에는 잘 느끼지 못하다가 불현듯 '대한민국의 귀한 미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던 어린이날,
(그래 이날은 정말 확실하게 주인공이 되었던 것 같다.)
거기에 굳이 내가 주인공이 아니어도 좋았던 어버이날, 스승의 날까지
세상의 기념일이 곧 내 기념일이었던 그런 날들이었다.



지금의 나는 무슨 기념일이 다가오면 일주일전부터 고민에 빠지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뭔가를 받는 다는 것도 좋고, 주는 것도 마냥 좋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색종이로 접은 종이꽃이나 풋내나는 그림, 손수건 하나만 준비해도 칭찬받던 날들을
이제는 추억이라 부르는 나이...........

지난 주말은 어린이날이었다.
아직 윤서는 자기가 어린이라는 걸 잘 모르는 3살이라
어린이날 선물보다는 그냥 아빠가 어디 안가고 자기를 안고
놀아주는 것만으로도 하루종일 만세와 함박웃음을 지어주었다.
'미운 7살'이 된 조카는 얄밉게(^^) 이것저것을 사달라 졸랐지만, 약삭빠른 작은 아빠인 나는 조카가 사족을 못쓰고 좋아하는 <스파이더맨 3> 팜플랫을 미리 준비해 주머니 부담을 조금 덜었다. (요즘 애들 장난감은 장난감도 아니고 장난감 아닌 것도 아니다.-.-;;)
아이들과 좀 놀아주었던 이력으로 무슨 날만되면 아이들 전담이 되는 나는
이날도 어른 대표로 꽤 피곤한 하루를 보냈다.
(마음은 좋았는데, 몸만 피곤했다. 어른들은 왜 맨날 피곤하지?)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만삭의 아내와 며칠 동안 양쪽 부모님들께 드릴 선물을 고심했다.
양쪽 어른들이 워낙 타고난 한국부모님(?!)들이라서 선물 하나 고르려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정확히 '뭐!'를 외쳐주시기라도 한다면 좀 나을텐데......
요즘은 용돈이 제일 쉬운 선택이라고들 하지만,
돈은 왠지 드리고도 마음이 편칠 않다.
뭘 준비하지...뭘 준비하지...아이 참..

그렇게 고민고민만 하다가 7일 밤을 맞았고,
나는 짧은 야근 뒤에 빈손으로 퇴근을 했다.
다행히 아내가 카네이션 두 개를 꽃집에 주문했다고 했다.
오늘 아침에는 다른 때보다 한시간쯤 일찍 일어나 아내와 둘이서
두분 가슴에 꽃을 달아드렸다.
얼마전 종이접기 강사 자격증을 딴 아내는 언제 만들었는지
예쁜 꽃모양 카드에 편지를 적었다.
(나한테 귀띔이라도 좀 하지..뭐라고 썼는지 내가 더 궁금했다.)
내가 한 일은,  그냥 어머니 가슴에 꽃을 달아드린 것 뿐이다.
"아이 뭐 이런걸 다"하며 수줍게 웃는 어머니와
"뭐하러 꽃을 두개나 사. 하나면 되지"라며 호통아닌 호통소리의 아버지를 뒤로하고 나는 후다닥 출근준비 모드로 들어갔다.

간만에 일찍 깨어 아빠의 출근을 배웅하게 된 윤서는
오늘따라 나에게 더 매달렸다.
다른 날 같으면
1. 양 볼과 이마, 입술에 십자가를 긋듯 뽀뽀 4번
2. 오른손을 번쩍 들어 하이파이브 자세로 '화띵'
3. 아빠 앙영다니세오(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하고는 후다닥 뽀로로를 보러 안방으로 달려가거나
제 하던 짓에 빠져 아빠가 어딜 가는지도 모르던 윤서였다.
오늘은 '앙뎨, 아이야(안돼, 아니야)'를 연발하며 눈물을 쏟았다.
걸음이 멀어질수록 울음소리가 커지더니 골목 모퉁이를 돌 때는
아예 절규와 오열로 동네 아침을 뒤집었다.
큰길에 들어설 즈음에야 메아리가 멈췄다.

버스를 기다리며 '이문세의 오늘아침'을 들었다. 역시나 어버이날 얘기가 많았다.
청취자들의 감동사연과 문세형의 찰진 얘기를 듣다보니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혹시  윤서가 어버이날이라고 아빠한테 뭔가 선물을 하고 싶었던걸까?
종이꽃도 못 만들고, 카드 하나 쓸 수 없는 윤서는
눈물과 절규로 자기가 아빠를 그만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나 보다.

여전히 나는 저녁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고민 중이다.
시골집 비닐하우스에서 하루종일 상추를 뜯고 계실 윤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는
어떻게 마음을 전해할지도 정말 고민이다.

태어날 때부터 나는 쭉 자식으로서 어버이날을 보냈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어버이'가 되어 보낸다.
복잡하지만 즐겁다.





* 누군가 "결국 자식자랑이네"라고 몽둥이를 든다면 달게 맞아야겠다. ^^;



애니콜로 찍은 영상을 올리면 왜 소리가 안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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