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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 - 살기

멘붕 탈출

by 멀리있는 빛 2012. 5. 3.

출근 무렵 전화 한통을 받았다. 친형제처럼 지내는 선배가 빙부상을 당했다는 소식이었다. 퇴근 뒤 부천에 사는 지인과 함께 빈소가 차려진 논산의 모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고인이 노환이 깊을 대로 깊어 가족이 이미 수일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한 터라 장례식장은 한결 차분한 분위기였다.


선배는 김해을 선거 캠프 자원봉사를 해야 한다며 형수에게 “며칠 다녀오마”고 집을 나섰다가 보름째인 총선일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장인이 위독하다는 긴급타전이 아니었다면 다음날이나 어쩌면 며칠은 더 김해에 묵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선배는 겨우 시간을 맞춰 장인의 임종은 지켰다. 그러지 못했으면 아무리 이해심 많은 형수여도 선배는 보름이나 집을 비우고, 임종 직전에야 병원에 당도한 ‘죄값’을 톡톡히 치러야했을 것이다.


그런데 평소에도 중학생짜리 자기 막내아들처럼 개구쟁이인 선배는 장례식장에서도 연신 싱글벙글했다. 게다가 자기 덕분에 임종 당시 분위기가 사뭇 괜찮았다(?)고, 그래서 보름간의 외출을 면박 없이 “한방에 퉁 쳤다”고 형수에게 혼나지 않은 것을 내게 자랑까지 했다.


이야긴즉슨, 외모와는 달리 살갑기 그지없는 선배가 의식 없이 산소호흡기에 겨우 바튼 숨을 잇고 있던 장인에게 “아버님, 지금까지 정말 잘 살아오셨어요. 주성이(막내아들) 엄마는 제가 깨 볶으며 잘 데리고 살 테니 이제는 마음 편히 가셔도 괜찮아요” 하며 손을 지긋이 잡아드렸더니 몇 분 뒤, 정말 영화처럼, 며칠째 생사를 넘나들며 가족을 애태웠던 장인이 알 수 없는 눈물을 주르륵 흘리더니 이내 편안하게 숨을 거뒀다고 한다.


선배는 내가 장례식장을 나설 때까지 시종일관 너스레를 떨었지만 나는 그 속을 알 것 같았다. 쉰이 넘도록 동생들 앞에서도 내색 없이 막내처럼 바지런한 선배가, 형수 말마따나 ‘주책스럽게’ 행동한 것은 분명 형수와 가족들이 안을 슬픔을 조금이나마 그런 식으로 덜어주려 한 것일 게다. 실제로 내가 있었던 몇 시간 동안 장례식장은 곡소리 대신 웃음소리가 더 자주 들렸다.


총선이 끝나고 여기저기서 ‘멘붕’을 호소하는 글들을 많이 보았다. (나도 얼마 전에 알았는데) 멘붕은 ‘멘탈 붕괴’의 준말로 어떤 일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황을 뜻하는 신조어다. 선거를 위해 동분서주 했던 지인 중에는 펑펑 눈물을 쏟아낸 이들도 있었고, 거꾸로 “열 받아 말도 하기 싫다며” 아예 일언반구 말을 닫아버린 이도 있다. 그래서 또 다른 어떤 선배는 “며칠 동안은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않는 걸로 위로하자”고도 했다.


나에게도 개구쟁이 선배 같은 넉살 혹은 능력이 있었다면, 슬픔을 희망으로 분노를 새로운 결의로 담금질하게 하는 혜안이 있으면 좋으련만 그건 영 쉽지 않을 것 같고. 어쨌거나 이 장례식 같은 분위기는 나부터라도 빨리 좀 벗어나야겠다. 


2012.0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