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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 - 놀기

가을비 우산 속에

by 멀리있는 빛 2010. 1. 14.

 


▶영화정보
 -제작년도 : 1979년
 -제 작 자 : 이우석
 -제 작 사 : 동아수출공사
 -상영시간 : 100분  
 -감    독 : 석래명 
 -각    본 : 김지헌
 -촬    영 : 정일성
 -조    명 : 차정남  
 -편    집 : 김진태 
 -음    악 : 이철혁 
 -녹    음 : 손인호
 -개봉극장 : 단성사  
 -관람인원 : 16만명  
 -출    연 : 정윤희, 김자옥, 신성일, 문정숙, 문미봉, 고아라, (아역:이재진, 배승현), 김민규, 이예성, 전 숙, 길달호, 박부양, 김준식 

 
 

그해 여름.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리는 끈적끈적한 땀을 닦아내는 일보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발목을 적시던 야속한 비에
자꾸만 구석으로 몰리는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게 더 버거웠다.
장마 끝의 화려한 휴가를 꿈꾸던 나는
처마 끝에서 국수 가락처럼 뽑아져 나오는 여전한 빗줄기를 보면서
차라리 서둘러 가을이 오기를 꿈꾸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염없이 내릴 바에야 이 눅눅하고 곰팡이 냄새나는 여름이나 빨리 보내버려라!’ 
      

서울에서 그림을 그리러 설악을 찾은 동원. 그는 예술적 한계에 부딪혀 괴로워한다.



그리움이 눈처럼 쌓인 거리를 나 혼자서 걸었네/ 미련 때문에 흐르는 세월 따라 잊혀진 그 얼굴이/ 왜 이다지 속눈섭에 또다시 떠오르나/ 정다웠던 그 눈길 목소리 어딜 갔나 아픈 가슴 달래며 /찾아 헤매이는 가을비 우산 속에 이슬 맺힌다 
                                                    - 최헌 ‘가을비 우산 속에’     
              

모든 것은 그녀 때문에
가을이 서둘러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만희 감독의 <만추>나 김기덕 감독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같은 영화를 보려고 했지만 ‘한 영화’하는 지인들을 통해도 좀처럼 구하기가 어려운 작품들이라 TCM의 이혜정씨에게 부탁해 <가을비 우산 속에>를 얻어서 보았다.

동원에 대한 연민의 정이 서서히 사랑으로 변한다.


이브 몽땅의 중후한 저음이 매혹적인 ‘고엽’ 만큼 최헌의 ‘가을비 우산 속에’는 찰진 그리움과 휑한 미련을 잘 담아낸 노래다. 내 나이보다는 삼촌뻘 쯤의 세대들에게 더 애절하게 들릴 노래지만 이맘 때 이 만큼 술맛 나는 노래가 또 있으랴.     


영화 <가을비 우산 속에>는 제목처럼 ‘가을비’ ‘우산 속’에서 시작된다. <미워도 다시 한번>의 몇 번째 시리즈였나? <사랑하는 사람아 3>를 마지막으로 스크린을 떠났던 그녀가 30년 전의 탱탱한 얼굴로 노란 코트에 노란 우산을 들고 빗속에 서 있다. 결혼과 함께 일상 속으로 사라진 배우 정윤희. 압구정동의 어느 아파트에서 세 아이를 키우며 보통의 아줌마로 살아간다는 그녀. 1954년생이니 이제 그녀도 오십견을 앓는 나이가 되었다. 어린 내가 봐도 고귀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그녀를 지금의 심은하나 김태희와 비슷한 배우라고 얘기한다면 20대의 영화마니아들에게 조금 이해가 될까(어린 영화마니아라니! 어른들이 이 글을 보면 나를 아주 주먹으로 내려치겠다).

정윤희가 출연한 영화를 몇 달 사이에 두 편이나(?) 보았다. 영화 속의 그녀는 70,80년대 최고의 여배우답게 우아한 분위기가 풍긴다. 몇년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렸던 ‘한국 영화 명배우 열전’의 주인공으로 그녀가 초대되었을 때 먼발치에서 잠깐 훔쳐본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게다가 지난 30여년간 한번도 그녀의 새 영화를 본적이 없으니, 감히 오십의 아줌마에게 여전히 가슴이 설레는 젊은 나를 용서하길...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

여인 1 

석래명 감독은 주인공의 심리 변화를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의 색깔로 나타낸다.

나는 평생 교단에 서서 귀엽고 사랑스런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었다. 캠퍼스 곳곳에 피어오르는 낙엽 때문인지 설악산에 있는 엄마 생각이 나서 오랜만에 나의 집 ‘설악장’에 돌아왔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주인 없는 빈방에서 그림에 미쳐 죽어가고 있던 동원씨를 처음 본 순간. 그건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이었을까? 한동안 내 머릿속에 그의 절규가 떠나지 않았다. 창가에 서서 구름과 안개가 몸을 섞는 산등성이를 바라보는 그를 보면서, 피 흘려 쓰러진 그에게 순결한 내 피를 수혈하면서, 나는 그를 사랑하리라 마음먹었다. 소식 없이 떠난 그의 자리에 우리 두 사람을 닮은 아이가 자라고 있다. 그리고 7년이 지났다.      

남자
아내는 오늘도 화방엘 다녀와서 요즘 잘 나간다는 화백의 그림 한점을 사들고 와 나를 자극했다. 아내는 헌신적이고 착한 여자다. 아내는 나만큼이나 나의 재능을 사랑한다고 했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아니 그릴 수 없었다. 설악장을 떠나 온 후, 선희에게 마지막 인사도 건네지 못한 그 날 이후로 그림은 더 이상 내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했다. 한번쯤 그녀를 만나보고 싶다. 그녀 어머니의 말대로 좋은 남자와 잘 살고 있겠지. 올 가을에는 설악장을 한번 찾아가봐야겠다.   


여인 2

남편이 설악산에 다녀 온 후로 무척이나 밝아졌다. 무엇보다 그림에 대한 열정을 되찾은 것이 가장 기쁘다. 나는 그가 설악산에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잘 알고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두 사람 모두 이런 순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남편은 나와 그녀 사이를 오간다. 내가 사랑했던 게 그였는지 그의 재능이었는지 이젠 잘 기억나지 않는다. 누구를 욕할 수 있을까. 막연히 ‘우리 중 누군가는 먼저 용단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프다. 그의 그림은 날로 좋아지고 있다. 어제 나는 설악장의 그녀를 만나고 왔다.    


7년 만에 설악장에 돌아온 동원. 그곳에서 자신을 아들을 키우며 홀로 사는 선희와 재회한다.



선희와 재회한 후 동원은 잃어버렸던 그림에 대한 열정을 되찾는다.



김자옥은 연기한 인물은 희생과 인내를 강요받는 전통적인 여성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쉬움을 준다.



한 남자와 두 여자에게서 태어난 어린 아이들. 두 아이의 천진한 웃음과 그들의 부모가 끝내 치유하지 못했던 상처가 오버랩 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미지와 색으로 통속의 한계를 벗어난 영화
솔직히 2009년의 우리가 1970년대 멜로영화를 보면서 <오아시스>나 <파이란> 같은 파격과 처절한 감동을 기대하는 건 너무 큰 욕심이다. 멜로야말로 이미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서 씨가 마를 때까지 써먹은 장르가 아닌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원치 않는 이별로 가슴 아파하다가 끝내는 두 사람 사이에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어떤 운명의 동아줄(예를 들면, 여자가 몰래 낳은 아이)이 이어져 있었다더라. 그래서 두 사람은 다시 만날 수밖에 없다’는 멜로영화 공식에서 벗어났던 작품이 얼마나 될까.

동원 역의 신성일

<가을비 우산 속에> 역시 우리가 익히 봐왔던 이야기의 수순을 충실하게 따라간다. 사랑을 핑계로 7년을 그렇게 허송세월한 여자나, 남편의 옛 여자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남편을 보내는 여자나, 두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척 하면서 희희낙락 하는 남자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냥 이야기의 껍데기는 이렇다.

그러나 <가을비 우산 속에>는 스토리가 중요한 멜로영화가 아니다(스토리마저도 괜찮았다면 더 없이 좋았겠지만). 이 영화의 매력은 ‘가을’과 ‘사랑’이라는 두 개의 화두를 완벽하리만큼 아름다운 구도에 담아낸 故 정일성 촬영감독의 영상과, 인물의 심리를 스크린 위에 그대로 심어 놓은 석래명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카메라는 인물과 배경을 회화적인 구도로 포착한다. 신성일이 머물던 설악장 주변의 자연풍경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처럼 원경과 근경이 뚜렷하고, 특히 계곡과 산등성이 사이를 흐르는 안개와 구름은 자연과 속세를 사이에 두고 흐르는 커다란 강처럼 무한한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회색빛으로 변해가는 산의 풍경과 주인공 정윤희의 노랗고, 파랗고, 빨간 원색의 의상도 대조를 이루는 듯하면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신성일, 정윤희, 김자옥

선희 역의 정윤희

다른 멜로영화들이 이야기의 전형과 통속의 틀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면 <가을비 우산 속에>는 배경과 인물의 구도, 이미지와 색을 활용해 거기서 벗어난다. 석래명 감독은 최고의 여배우 정윤희와 <쉬리>와 <서편제>를 모르는 우리 할머니도 잘 아는 배우 신성일, 이젠 어엿한 안방의 중견이 된 김자옥, 이 세 사람과 정일성의 카메라만으로 서울에서 단관 개봉해 16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30년이 지난 지금, <가을비 우산 속에>는 중년 관객들의 기억에 몇 개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다. 정윤희는 스크린을 떠난 지 오래고, 신성일은 이제 할아버지다. 김자옥은 주말드라마에서 푼수(?)끼를 풍기는 엄마가 되어있다. 뭐 그럼 또 어떤가? 가을비 우산 속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가을에 반드시 들어야 할 노래 중 하나고, 이제 나는 뭔가 허술하고 투박해도 '추억'이라는 양념만 곁들여 있으면 좋아라 웃는 완전 아저씨가 되었는걸...... 


p.s.
불경기 따위는 개의치 않고 눈치도 없이 주말과 공휴일 틈새에 턱하니 끼어 찾아온 추석. IMF 이래 최대의 경기침체로 무거워진 어깨가, 그래도 한가위 보름달 앞에서 활짝 펴지기를 기대했던 나.  벌써 10월 중순이다. 여름날에 잃어버린 이야기들이 내 가슴 속에 아직도 이렇게 처연한데 가을에 대해서 얘기해도 될까. 가을에 젖어 봐도 괜찮은 걸까. 아니. 열심히 살아야지. 열심히 살아야지. 이제는 노란 우산을 접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