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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 - 놀기

그리운 사랑방 손님, 김진규

by 멀리있는 빛 2010. 1. 14.

김진규(1923-1999)는 일생동안 500여 편의 영화에 주, 조연으로 출연했다. 지금의 영화계 실정에 비교한다면 그가 출연한 ‘500’이라는 숫자는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기록적인 수치지만 배우 김진규를 단순히 많은 작품에 출연한 인기배우라는 수사에 한정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숫자는 한국영화의 역사 속에서 그가 배우로서 얼마나 많은 자취와 성과를 남겼는지 가늠하게 하는 하나의 징표로 받아들여야 한다.

평론가와 관객들이 흔히 거장이라 칭송하는 감독들의 대표작에는 김진규의 이름이 곧잘 등장한다. 홍성기의 59년작 <청춘극장>, 정창화의 <장희빈>, 유현목의 <오발탄> <잉여인간> <순교자>, 신상옥의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벙어리 삼룡이>, 김기영의 <하녀> <고려장> <렌의 애가>, 이만희의 <삼포가는 길>까지 거장들의 영화에 새겨진 김진규의 이름은 한국영화계에서 그가 얼마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으며 다양한 연기의 폭을 가진 배우였음을 증명한다.

조선연예주식회사의 연구생으로 들어간 김진규는 스무살 때부터 노래와 연기를 시작해 해방 전후 10여 년 간 무대생활을 했다. 영화가 아직 대중적으로 크게 어필하지 못하고 악극단의 공연 문화가 성황을 이루던 시기, 김진규는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살구꽃>이라는 작품으로 그의 연기 인생에 첫 발을 내딛고 해방 이후 배우 장동휘와 함께 극단을 설립하는 등 연극 배우로서 활발히 활동했다.


천의 얼굴 속의 리얼리티

벙어리 삼룡이

벙어리 삼룡이

김진규의 영화 데뷔는 서른이 넘어서 이뤄졌다. 1954년 이강천 감독은 나운규의 ‘아리랑’을 50년대 시대상황으로 각색하여 만든 영화 <아리랑>이 흥행에 성공하자 이 작품의 시간적 연장선상에 있는 새로운 반공 영화를 준비했다. 4개월 간의 혹독한 촬영 끝에 완성된 <피아골>은 지리산에서 암약하는 빨치산들의 비극적인 생활과 이데올로기의 갈등, 극한적인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수작으로 반공 영화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영화 속에서 처음으로 빨치산의 인간적인 모습과 내면적인 갈등을 잘 묘사해내 화제를 모았다. 허리춤까지 쌓인 눈과 바람이 멈추지 않는 해발 2천 미터의 겨울 지리산 자락을 돌아다니며 사실적이고 스케일 넘치는 영상을 선보인 <피아골>은 제 1회 청룡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고 흥행에도 크게 성공해 영화배우로 첫 스크린 데뷔를 치른 연극 배우 김진규를 영화계의 새로운 유망주로 부각시켰다. 한편의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그는 이듬해에 <처녀별> <포화 속의 십자가> <옥단춘>등 서너 편의 영화에 동시에 주연으로 캐스팅 되면서 신인 배우로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인간의 고뇌를 안은 스크린의 신사
한국영화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는 비교적 안정된 자본과 체계적인 제작 시스템이 이뤄져 영화의 제작 편수도 1년에 200여 편까지 이르던 전성기였다. 스크린도 흑백에서 총천연색으로 변화하고 영화계의 흐름이 반공에서 문예영화로 이어지면서 예술적인 완성도를 높이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고 촬영과 음악에도 높은 비중을 두어 외국의 대작 영화들에 관심을 쏠려있던 젊은 관객들과 지식인들의 눈이 한국영화로 옮겨지게 됐다.

삼포가는길

삼포가는길

김진규는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서 활동하던 배우였다. 그에게는 60-70년대 한국영화의 대표 배우로 활동하던 최무룡이나 신영균, 남궁원, 신성일 등 익히 알려진 미남 배우들과는 다른 이미지가 담겨있다. 그는 흔히 스타급 배우들이 주 무기로 삼던 섹슈얼리티나 남성적인 카리스마보다는 섬세하고 과묵한 내면연기와 선량하고 신사적인 분위기로 고뇌하는 지식인, 시대의 아픔을 대변하는 약자의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어필했다.

신상옥 감독의 61년작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김진규는 친구의 아내인 옥희 어머니를 사랑하게 되지만 마음 한번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떠나는 과묵하고 소심한 신사로 나온다. 이 작품에서 김진규가 보여준 정적인 내면 연기는 이전의 작품에서 넘지 못했던 과장된 연기를 털어 내고 새롭게 거듭났다는 평을 들었다.

섬세한 표정과 눈빛만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줄 아는 김진규는 유현목의 <오발탄> 신상옥의 <벙어리 삼용이> 등 걸작 영화들과 만나면서 점점 깊이를 더해 갔다. 특히 병든 사회와 뒤엉킨 운명 속에서 신음하는 <오발탄>의 송철호와 인생의 막장에 접어들어 갈 곳을 잃고 방황하던 <삼포 가는 길>의 정씨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배우 김진규를 쉽게 잊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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