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遊 - 놀기

절망 끝에서 목놓아 부르는 희망 <오발탄>

by 멀리있는 빛 2010. 1. 14.

절망 끝에서 목놓아 부르는 희망
오발탄


제작년도  1961년
제 작 자  김성춘
제 작 사  대한영화사
기 획  박경식
감 독  유현목
각 본  이종기
촬 영  김학성
조 명  김성춘
편 집  김희수
음 악  김성태
미 술  백남준, 이수진
제작비용  6천만 원
상여시간  105분
개봉극장  국제극장
출 연  김진규, 최무룡, 문정숙, 윤일봉, 이대엽, 서애자, 김혜정, 문혜랑, 양일민, 유계선,
남춘역, 고설봉




지하철 1호선을 타고 남영 역에서 내려 크고 작은 주점과 패스트푸드 전문점 사이를 지나 가까이 보이는 남산을 향해 조금 걷다 보면 실뿌리처럼 흩어져있는 작은 골목들을 하나로 모아놓은 듯한 둥그런 터에 이른다. 이 터를 중심으로 위로 올려다 보이는 곳이 우리가 흔히 해방촌이라 부르는 곳이다. 해방촌은 8.15 해방 이후 아픔의 역사가 만들어낸 서울의 새 동네다. 6.25 전쟁이 끝난 뒤 서울 주둔 미군기지로서 군사지역의 면모가 강화되고 미군들을 위한 상점과 가건물 주점, 기지촌 등이 들어서면서 이 부근은 미군위락지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전쟁통에 북에서 남으로 피난 내려온 사람들이 헐거워진 보따리를 풀고 한쪽에 터를 잡으면서 해방촌 사람들의 삶이 시작됐다.

 

해방촌 사람들

삶의 터전을 잃고 가진 것 없이 떠나온 자들에게 서울은 너무 황량하고 살기 힘든 땅이었다. 이들이 용산 일대에 몰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 중 하나는 그나마 날품이라도 팔아 생계를 유지하기에는 서울역과 남대문이 가까운 이곳이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해방 이후 일본인들이 자기네 나라로 돌아간 후 마을 대부분은 주인 없이 비어 있는 곳이 많았다. 전쟁 후 얼마간 서울에 새로 건축된 주택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미군정청은 몰려든 새 주민들의 주거정책으로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들의 제공과 폐업상태에 있던 일본인 소유의 8개 고급 요정을 개방 제공하려고 했지만 실현을 거두지는 못했다. 기댈 곳 없는 피난민들은 주변의 허물어진 건물 틈새에 천막이나 판자로 비바람을 피할 정도의 공간을 마련해 소위 해방촌을 형성했다. 월남민들에 이어 60년대에 농촌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은 해방촌 2세대가 됐다. 소설가 강신재는 1957년에 발표한 <해방촌 가는길>에서 해방촌의 좁다란 억덕길을 ‘굴러 내려 데굴거리는 돌멩이들로 어느 험한 골짜기와 비슷한 곳’이라고 했다. 이 좁고 험한 동네의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사람들은 억척스런 생명의 끈을 잡고 줄다리기를 했지만 좀처럼 살만한 날은 오지 않았다.


<오발탄>은 전쟁 이후 월남한 송철호와 그의 가족들의 삶을 통해 전후의 비참하고 혹독했던 남한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자유당 말기의 한국 사회는 정치적인 부패와 생활의 빈곤이 극에 달해 서민들의 삶이 벼랑 끝에 몰려 있었다. 가치관의 혼란과 배고픔 속에서 희망의 가능성을 찾는 일은 부질없어 보였고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생존의 본능도 갈라진 벽 틈을 비집고 불어오는 겨울 바람에 오그라들던 때가 그 즈음이었다. 해방촌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한참 올라가면 송철호 일가가 사는 판자집이 빈약해 보이는 기둥 몇 개에 겨우 몸을 의지해 버티고 서있다. 생면부지의 땅에서 오갈 데를 찾지 못한 그의 가족은 다른 피난민들처럼 해방촌에 터를 잡고 하루하루를 버티며 산다. 계리사 사무소에서 서기로 일하고 있는 철호는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가고 있지만 그의 주변 환경은 평범한 그의 소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전차 값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박봉으로 겨우 가족의 굶주린 허기를 채우는 것이 그가 가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의 전부다. 전쟁 중에 몸이 쇠약해진 어머니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정신 이상자가 되어 방안 구석에 거적더미처럼 누워만 있다. 노인은 돌아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다 이내 미쳐버렸고 ‘가자, 가자!’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전쟁 중 총상을 입고 상이용사가 되어 제대 한 동생 영호는 2년이 넘도록 취직을 못하고 다방과 서울 변두리를 전전하며 방황하고, 착하고 순진한 여동생 명숙은 불구가 되어 돌아온 애인에게 버림받은 뒤 양공주로 전락한다. 꿈 많은 음악도였던 철호의 아내는 가난한 삶에 못이 박혀 낡은 부뚜막과 허름해진 그녀의 치맛자락처럼 만삭이 되어서도 점점 야위어 간다. 이 모든 상황들이 장남인 송철호에게는 내려놓을 수 없는 짐이다. 가난한 살림 때문에 어린 딸이 그토록 바라던 300원짜리 고무신 하나 맘놓고 사줄 수 없고 때를 가리지 않고 찾아와 머릿속에 칼침을 쑤셔대는 치통에도 병원을 찾을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는 그저 참고 또 참으며 묵묵히 집을 나서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뿐이다.

 

가야할 곳을 조용히 묻다
밑바닥의 인물과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 상황들은 부정 부패로 인한 불신과 절망 때문에 삶의 지향점을 잃어버린 60년대 남한 사람들의 모습 그 자체다. 소설 <오발탄>은 이런 현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작가 이범선의 울분이었다. 유현목 감독은 포기할 수도 매달릴 수도 없는 어두운 현실을 감성이나 눈물에 호소하지 않았다. 카메라는 조용하지만 인물들의 표정과 동선을 명확하게 포착해내고 그들의 고통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되는지 잘 보여준다. 그의 어머니가 ‘가자, 가자’를 외치며 돌아가길 애원했던 곳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철호는 왜 아무런 혁명도 꿈꾸지 않고 그저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한탄하며 밤거리를 헤매었을까? 관객들은 왜 영화가 좀 더 명확한 해답을 주지 않을까 궁금해한다. 그러나 유현목은 작위적인 희망과 해피엔딩으로 결말을 맺지 않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철호는 치과에 들러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억지로 이를 두 개나 빼고 피 흘리며 심야 택시에 오른다. 눈부신 서울의 밤거리를 떠돌던 그는 불현듯 어머니의 외침을 되뇐다. “가자..가자!”. 극대화된 절망과 혼돈은 왜 선량한 소시민이 결국은 패배와 굴욕을 감수하게 되는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정지하며 더욱 더 처절하고 암담한 현실의 벽을 통해 관객들에게 그 질문의 해답을 고민하게 만든다.

어쩌면 60년대의 관객들은 영화 <오발탄>을 싫어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관객들이 이창동의 <박하사탕>이나 <오아시스>를 보며 언짢아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영화에서까지 서로의 상처를 확인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거꾸로 <오발탄>은 60년대의 그들보다 2000년대의 우리들에게는 영화적으로나 시대적으로 더욱 많은 감동과 여운을 남겨준다. 궁핍과 절망에서 몇 걸음 벗어난 현대인들에게 영상 속에 벌어지는 비극은 생경하지만 설득력 있는 감동을 선사한다. <오발탄>은 현대인들이 가야할 곳이 어딘가 조용히 묻고 있다.

그렇다고 영화 <오발탄>이 철저하게 예술적인 영상미와 현실에 대한 질문으로만 가득한 영화는 아니다. <오발탄>에도 곳곳에 흥미와 재미를 위한 요소들이 있다. 주인공 송철호가 현실의 비참함을 표현하는 중심축이라면 동생 영호는 장르영화의 재미를 채워주는 인물이다. 영호는 다방 종업원에서 영화배우로 성공한 여인과 야전병원에서 만난 간호장교 설희와의 재회를 통해 한국 관객들에게 친숙한 멜러드라마적 재미와 헐리웃과 유럽에서 유행하고 있던 느와르 영화의 긴장감을 충족시켜 준다.

 

상영 금지작에서 한국영화의 최고 걸작으로

1956년 <교차로>로 데뷔한 유현목 감독은 <오발탄>을 비롯해 <인생차압>(58), <김약국의 딸들>(63) <사람의 아들>(80) 그리고 95년 작 <엄마와 별과 말미잘>까지 총 44편의 영화를 만든 한국 영화의 큰 기둥이다. 조선일보 동인문학상의 후보작이었던 소설 <오발탄>을 읽은 유현목 감독은 그가 느꼈던 원작의 감동을 반드시 영상으로 표현해야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에서 영화 <오발탄>을 만들게 됐다고 회고한다. 1961년에 완성된 이 영화는 5.16 쿠테타의 군부세력에 의해 상영이 중지되었다가 1963년에 다시 상영되었다. 그들이 가장 문제삼았던 장면 중 하나는 주인공 송철호와 그의 노모가 “가자. 가자!”라며 부르짖던 부분이었는데 허무와 절망에 찬 기도가 월북을 상징하지 않느냐는 억지로 영화의 상영을 막았다. 다행히 재개봉된 <오발탄>은 평단과 관객들의 극찬을 한 몸에 받고 한국영화의 최고 걸작으로 추앙 받게 됐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오발탄>은 영화의 원판이 분실되어 샌프란시스코 영화제에 출품된 보존판 밖에 없다.
몇년전 모 일간지가 한국 영화 걸작 50편과 영화인 50명을 선정 발표했다. <오발탄>은 설문에 응한 영화인 31명 가운데 11명이 1위로 꼽았다. 배우 김진규는 걸작 50편 중 무려 8편에서 주연을 맡아 역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배우임을 입증했다. 3편 이상을 순위에 올린 영화인들은 신상옥과 이만희, 이장호, 박광수 그리고 배우로는 김승호 최은희 조미령 신성일 문성근 등이다. 선정된 영화들 중에는 최근작들도 여럿 있었지만 90년대 데뷔한 신진 영화인들 중에 눈에 띄는 감독이 별로 없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최근 한국 영화에는 냉철한 현실을 고발하고 솔직한 언어로 삶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영화가 오로지 삶의 교과서처럼 정직하고 올바른 길만 제시하길 원하지 않지만 과장과 페러디 일색인 요즘의 영화들 틈에서 <오발탄>같은 모범사례를 기다리는 마음이 간절한 것도 사실이다.


거목, 메가폰을 내려놓다

한국 영화계의 거목이었던 유현목 감독은 지난 6월 28일 마침내 육신의 메가폰을 내려놓고 고인이 되었다.
그는 1995년작 <말미잘>을 끝으로 연출에서는 손을 놓았지만 수많은 영화계 행사에 참여하고 자문을 맡으며 원로로서 듬직한 모습을 보여왔다. 몇년전 전주영화제에서 직접 뵙고 몇마디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연세에도 참 겸손하고 손자뻘인 내게 예의가 깍듯하셨던게 기억이 난다.
<오발탄> <김약국의 딸들>  <인생차압>  <수학여행> <사람의 아들>  <장마> 등 그의 필모그라피에는 한국영화사를 길이 빛낼 귀한 작품들이 정말 많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며 잊혀진 한국의 명장과 걸작들이 올바른 재평가와 사랑을 받길 바라는 마음을 함께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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