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
흑산도라 검은 섬
암벽에 부숴지는 하얀파도 없다면
남해 바다 너 무엇에 쓰랴
전라도라 남도길
천군만마 휘날리는 말발굽 소리 없다면
황산벌 너 무엇에 쓰랴
무엇에 쓰랴
천으로 만으로 터진 아우성 소리 없다면
이 거리 이 젊음 무엇에 쓰랴
살아라 형제여 한번 살아 봐라
한 번 죽어 골백번 영원으로 살아라.
창대빛 죽창에 미쳐 광화문 네거리 후두둑 떨어지는
녹두꽃 햇살에 미쳐
사월의 자유에 미쳐
- 김남주 시집 <나의 칼 나의 피>, 고은, 양성우 編, 인동(1987)
다시 듣는 노래 이야기 - 정인화
노래 '춤'은 같은 제목의 김남주 시인의 시를 노래로 만든 것입니다.
1985년 10월도 다 저물어갈 무렵, 나는 산에서 내려왔습니다. 총학생회 일을 마친 후 지리산 자락에 은거하고 있던 나는 목욕을 하러 읍내에 나왔다가 신문을 사 펼쳐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회면 한 귀퉁이에 있는 친구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점거 시위로 구속된 친구의 이름이었습니다.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그 길로 나는 학교로 달려왔고 그 얼마 전에 사랑하던 후배가 구속됐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상념에 젖어 하염없이 교정을 거닐다가 학교 앞 책방에 복사된 시집(당시에는 이런 게 다 금지된 출판물이었답니다)을 한 권 사 들었습니다. 잘 아는 책방 주인이 나에게 준 것이었지요. 김남주의 시집이었습니다.
자취집으로 돌아온 나는 기타를 집어들었습니다.
친구와 후배의 얘기를 엮어 노래를 만들었습니다. 20년이 지난 아직도 이 노래의 제목은 없습니다. 이 노래를 많은 후배,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 친구의 출소 환영연이었지요 - 울면서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발표를 한 적은 없습니다. 이튿날 시집을 받았던 그 책방에서 주인에게 한 번 들어보겠냐고 해서 불렀던 게 처음이었습니다. 주인은 좋은 노래라고 하였습니다.
언제인지 기억이 불분명합니다. 아마 86년이나 쯤 아니겠나 싶습니다만, 부산에서 '노래야 나오너라(노나라)'란 노래 운동패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노찾사(노래를 찾는 사람들)의 부산 공연이 있었습니다. 그 공연에서 '노나라'가 "부산 대학교를 나오신 선배께서 만드신 부산에서 처음으로 나온 노래를 자신있게 소개한다"는 멘트를 하면서 불렀던 게 대중 앞에 처음이 아니었던가 싶은데, 지금의 제 아내가 당시 공연을 녹음해둬서 물어봤습니다만 너무 오래 전 일이라서 정확한 시기를 잘 기억 못하겠네요.
다만 '춤의 작곡 시기는 정확하게 압니다. '1985년 10월 25일' 당시 습작 노트에 그렇게 기록돼 있네요.
참 나의 그 친구는 나중에 학교 앞에 '춤'이란 주점을 차렸습니다. 지금도 그 '춤'은 장소를 옮겨 여전히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지금 저와 가장 가까운 곳에 함께 있구요. 노래 '춤'을 많이 사랑해 주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뒤늦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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