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늦은 시각에도 불이 꺼지지 않은 사무실을 보고 있노라면
굳이 그 안에 일하는 사람이 누구라도 상관없이 측은한 마음과 함께 묘한 동질감을 느끼게 된다.
올해 나온 OECD의 통계결과를 보면 한국은 여전히 노동시간 세계 2위, OECD 가입국 가운데서는 1위를 달리고 있다.
이러니 대한민국 직장인치고 야근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야근에 임하는 자세는 ‘하라고 하니까’와 ‘해야만 하니까’로 크게 두 가지다.
둘의 차이라면....내 의지가 조금이라도 들어있느냐 아니냐의 정도?!
하지만 이달에 만난 주인공들의 야근 사유는 다른 이들과 비슷하면서도 사뭇 다른 점이 있었다.
사진을 찍는 이**씨와 후배 권**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유치원을 찾은 날은
동장군이 수은주를 급강하시키며 모처럼 한겨울다운 맹위를 떨쳤던 12월16일 밤이었다.
인천시 동암역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20여분을 달려 내리니
까맣게 어둠이 내린 동네에 마치 옥상 위의 빨간 십자가처럼 홀연히 불을 켠 **유치원 간판이 보인다.
한손에는 피자, 한손에는 음료를 들고 볼과 손이 꽁꽁 얼어붙어 현관문 열기도 버거워하는데,
어느새 문이 스-윽 하고 열리며 우리들 앞에 환하게 웃는 강** 원감선생님이 등장한다.
화사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주는 교무실에 들어서니 꽃다운 외모의 여섯 교사들이
산타할아버지며 크리스마스트리며 다음날 미술수업에 쓸 자료들을 책상 위에 가득 쌓아놓고 만들기에 열중이다.
“이거 혹시 저희 때문에 예정에도 없는 야근을 하고 계신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첫 만남인데다 이미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때라 멋쩍고 미안한 마음에 너스레를 좀 떠는데,
좀 전에 원감선생님이 보여주었던 것과 꼭 닮은 여섯 개의 미소가
신발을 벗는 땀내나는 내 발끝에 사르르~ 인사하듯 내려앉는다.
“아니에요. 평소에도 이 시간에 일할 때가 많은 걸요.
아이들이 아직 어리기 때문에 이렇게 수업준비를 꼼꼼하게 해놓지 않으면
다음날 수업에 지장이 많아요. 아이들한테 준비 안한 거 걸리지 않으려면 열심히 준비해야 해요.”
앳된 외모와 달리 이미 결혼해 어엿한 가정을 이뤘다는 신혼의 한 선생님이 말을 받는다.
아쉽게도 부군과 자신의 직장이 거리가 멀어 신혼인데도 주말부부 생활을 한단다.
그래서 괜히 “저런, 안됐어요...” 하며 누가봐도 속이 뻔하게 드러나보이는 형식적 위로를 하려는데
선생님, 잽싸게 내 말을 가로채더니
“그래서 더 연애하는 기분으로 살아요. 호호호” 하며 새색시 볼이 되어 웃는다.
“근데 선생님들은 애들이 그렇게 좋으세요? 전 애가 셋인데,
아무리 우리 애들이라지만 30분만 같이 있어도 혼이 다 빠져나가는 통에
틈만 보이면 잽싸게 도망쳐버리기 일쑤거든요.”
“그러니까 저희가 유치원 교사죠. 애들 데리고 하는 일이라고 쉽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나마 이정도 경지(?)에 이르는 것만도 넘어야 할 산이 한 두 개가 아니에요.”
“그래도 그 많은 애들이 다 똑같이 예쁜 건 아니겠죠?”
“솔직히 말하면 조금, 아주 조금 미울 때가 있기는 해요(웃음). 반대로 남달리 정이 가는 애들도 있고요.”
“아, 선생님도 그래요? 혹시 지금 제일 먼저 떠오르는 녀석이 누군가요?”
갑자기 옛날 생각이 밀려오는지 ‘문**’이라는 이름을 덥석 꺼내든 선생님이
마치 여고시절 MT 가서 담요 덮고 앉은 소녀처럼 초롱초롱한 눈이 되어
첫사랑 이야기를 하듯 풋풋한 기억들을 술술 쏟아낸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는 게 이런 것인가? 자기 품을 떠난 지 한참이나 된 녀석인데
이름만 떠올려도 흐뭇해지는 게 바로 교사들이 말하는 ‘보람’이란 것인지 모르겠다.
사범대 재학시절 비슷한 경험과 상상을 많이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다 가라앉는다.
어색했던 처음 분위기와는 달리 아이들 이야기가 나오면서
선생님들의 눈빛과 표정이 달라지는 게 확연하게 느껴진다.
30분 동안 몇 마디 하지 않던 선생님들이 이제는 마치 준비해 놓았던 원고를 읽듯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술술 풀어낸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어느새 뱃속에서 밥때가 지났음을 맹렬하게 알리기 시작한다.
예의 차린답시고 사들고 간, 그러나 이미 동장군의 입김에 차갑게 식어버린 피자 두 판을
생색내듯 탁자 위에 펼쳐내니, 익숙한 동작으로 선생님들이 의자며 음료수를 가지런히 따라 놓고
나에게 먼저 건넨다.
마지막 남은 피자 한 조각을 두고 ‘저걸 도대체 누가 먹을 것인가’를 서로 눈치보며 고민하는 동안
시계바늘이 어느새 밤 9시 반을 째깍째깍 넘어가고,
야근하던 여섯 명의 교사들과, 그들을 취재하느라 어떨 결에 또 야근을 하게 된 나와 동료들이
낯설고도 친근한 동지애를 주고받으며
‘잘 가세오~, 잘 있어요~’ 어릴 때 불렀던 노랫말처럼
아쉬운 안녕 인사를 한다.
'生 - 살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0) | 2009.12.31 |
---|---|
[펌글] 비교하지 않으려도 너무 비교 되는 두 대통령... (0) | 2009.12.30 |
크리스마스 자정에서 아침까지.....문자 메시지들 (0) | 2009.12.26 |
우리들의 고향 (0) | 2009.12.15 |
영서 첫돌 (0) | 2009.12.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