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마포의 어느 선술집에 들렀다가
내 머리 위 백열등갓에 붙어 있는
어느 일가족의 메모 묶음을 보았다.
퍼즐 같은 메모 조각을 끼워 맞춰보니 내용이 이렇다.
결혼 20주년을 맞은 중년의 부부와
연애 200일을 맞은 그들의 아들 커플이
내가 앉은 이 테이블에서 가족모임을 했다.
보아하니 아들은 입영날짜를 받아놓은 상태다.
각기 다른 글씨체로 적힌 메모 내용은....
메모 1. 아빠가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진아. 2년 동안 신발 뒤로 신지 말아라
진심으로 사랑해라.
메모 2. 아빠가 엄마에게
*희야. 20년 동안 고생 많았다.
사랑한다.
메모 3. 아들의 여친이 미래 시부모님(진정 그리 되길 빌며)에게
어머님, 아버님. 저희의 멘토인 만큼
앞으로도 쭉~ 아름다운 사랑하세요!
메모 4. 이건 누가 누구에게 쓴 메모인지 가물가물(아마 아들이 부모님에게 쓴 듯)
20년 동안 살아줘서 감사함다.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게요.
날짜를 보니 2013년 4월 3일, 지금부터 약 넉달 반 전의 일이다.
지금쯤 아들은 훈련소를 거쳐
자대에서 이등병 생활에 눈물을 훔치고 있을 것이고
아들의 여친은 가슴 졸이는 문자와 편지
그리고 이따금씩 면회로 뜨거운 재회와 이별을 반복하고 있겠지.
부부는...아들 소식에 가슴 졸이며,
20년 숙성된 믿음으로 둘만의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겠지.
애교 많은 여친은 남친의 부모님에게 가끔 전화를 걸까?
쓸데없이 남의집 후일담을 걱정하고 상상하며
이름 모를 그들의 행복한 순간을
카메라에 훔쳐 담아 집에 돌아왔다.
괜히 나도 행복했다.
가끔씩 내 것처럼 꺼내 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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