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作 - 짓기

보따리 쌈짓돈

by 멀리있는 빛 2014. 3. 16.




할머니

가끔 어딘가 당신도 모르는 곳에 마음 흘리고

딴 사람 되어 돌아오시네

귀신처럼 기척 없이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마루에 걸터앉아

신세를 돌아보시나 지나는 행인들의 걸음을 세시나

자글자글 깊어진 주름살만 씰룩씰룩

할머니, 들어오시쟎고 뭐하세요

내 말에는 대꾸도 없이 한 손으로 허공만 훠이

그리곤 보따리 하나를 털썩 내미시는게지

"다른 사람들한틴 말하면 안뒤야"

보따리가 화수분이냐

할머니 참 담은 것도 많아

저것은 어릴적 장판 밑에서 발견했던

그 곰팡이 냄새나는 쌈짓돈인가도 싶네

아버지가 드린 용돈

얼마나 몇 년이나 모아오셨나

누군가 버리고 간 종이박스와

거리에 널부러진 빈병 모으러

동네 곳곳 탑돌이도 열심이셨지

내 나이쯤 돼 뵈는 저 누더기 황색봉투는

젊었던 아버지의 것이었겠지

서툴지만 꼼꼼한 셈으로

할머니 쌈짓돈은 그렇게 불어갔네

주름살만큼이나 낡은 세월들

침 묻혀가며 하나씩 펴보다가

눈이 시려 몇 번이나 다시 세는데

어느틈에 또 다녀가시는 길인지

저만치 연분홍 치맛자락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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